(8일째) 만사는 서사에 대해 더 알고 싶다
피터 브룩스, 《스토리의 유혹》 (2023)
만사는 서울외계인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서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서사와 관련된 이런저런 책들을 보고 있는데, 얼마 전 “‘서사적 전환(narrative turn)’을 주도한 당대 가장 중요한 서사이론가로 유명”하다는 피터 브룩스의 새 책이 출간되었다. 재밌는 건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플롯 찾아 읽기》는 절판 상태인데, 알라딘 중고 최저가가 96,000원이라는 거다.
《스토리의 유혹: 내러티브의 사용과 남용》, 피터 브룩스(지음), 백준걸(옮김), 앨피, 2023.
이 책은 “이제 서사는 인간사를 지배하는 유일한 형태의 지식과 언어로 받아들여진 것 같다”(p.19)는 문제의식으로 시작한다. “합리적인 분석에 전념해야 할 공적 시민 담론마저 서사에 인질로 잡혀 버린 듯한 상황”이고, “이와 같은 내러티브의 현실 장악”, “현실의 이야기화(storification)”가 이 책을 쓰게 된 이유이다.
이제 모두들 이야기의 힘을 이야기한다. 일부 영역에 한정되지 않는다. 글을 쓰든, 사진을 찍든, 상품을 만들든, 서비스를 제공하든 서사, 내러티브,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고들 말한다. “이야기의 과잉” 시대라 할 수 있겠다.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러 인류가 당시까지 지배적이던 인간 조건에 대한 신성한 관점에서 탈피하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설명해야 하는 세속적 세계로 진입하면서, 내러티브는 필수적인 앎의 형식이 되었다. (p.39)
그리고 이 “이야기의 과잉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프랑스 구조주의자들의 ‘서사학’을 경유하여 이야기를 분석적으로 연구하는 것”이고, “내러티브가 체계로, 수사학으로, 즉 설득의 수단으로 작동하는 방식에 주목함으로써 내러티브에 대한 욕망과 필요를 사유할 수 있을 것”(pp.51~52)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자아 서사, 즉 “결국 우리는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는 자서전적 서사가 된다.”(제롬 브루너), “이 서사는 우리 자신이자 우리의 정체성이다.”(올리버 색스) 등 “삶의 의미를 찾는 이야기의 힘이 가장 중요하다”(pp.172~173)라는 주장들을 여러 곳에서 비판한다.
“자아 서사가 곧 나이기를 바랄 수는 있”으나 “이는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인, 심지어 독아론적인 입장”이라고 본다. “자아에 관한 담론은 서사를 통제하는 자아의 능력에 의문을 던지는, 질병과 죽음을 포함한 온갖 운명의 반전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기를 인식하는 자아 화자로서 우리는 내러티브가 우리의 문제와 타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불충분하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p.173)
이야기는 강력하다. 그래서 강력한 비판적 대응이 필요하다. 우리는 총괄적 설명 능력이 있다는 이야기의 주장을 해체하고 문제 삼아야 한다. …
이야기는 교묘하다. … 경계심이 필요하다. 그와 동시에 “유용한” 도구적 지식에 대한 집착이 심해지는 사회와 교육제도에서, 우리는 놀이의 정신이 인간 발달에 여전히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pp.187~188)
저자는 “인문학이 제공하는 반성적 지식, 즉 경제·윤리·정치의 지배적 서사를 분석하는 작업이 절실”하며 “공적 영역에서 문학적 인문학의 역할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결론 맺는다. “그것은 세상을 거짓되고 총체적인 시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에 맞서 공적인 저항 도구를 제공하는 일, 우리 시대의 유해한 신화를 해체하는 방법을 전파하는 일이다.” (p.231)
이 책의 논증에 기여하고 있는 여러 책들 중 주목한 책이 있다. 저자가 “유희의 본질과 용도를 명쾌하게 설명한 책”이라고 언급한 도날드 위니캇의 《놀이와 현실》이다.
유아기에 아이가 ‘중간 대상(transitional object)’(장난감, 담요 등 유아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관찰함으로써, 아이가 환경에 압도되지 않고 창의적으로 세상에 반응할 수 있는, 내적 현실과 외적 현실 사이의 중간 경험 영역을 밝혀냄 (p.163)
"중간 대상과 중간 현상은 최초 경험의 밑바탕을 이루는 환상의 영역에 속한다. 내적 또는 외적 (공유) 현실에 속한다는 점에서 도전받지 않는 중간 경험 영역은 유아 경험의 큰 부분을 구성하며, 일생에 걸쳐 예술과 종교와 상상력과 창의적인 과학적 연구에 몰입할 때 느끼는 강렬한 경험을 통해 유지된다."
"문화적 경험이 이루어지는 장소는 개인과 환경(원래는 대상) 사이의 잠재적 공간에 있다. 놀이도 마찬가지다. 문화 경험은 놀이에서 처음 나타나는 창의적인 삶에서 시작된다." (p.164)
이 중간 대상, 중간 경험 영역이라는 개념이 흥미롭다. 예전부터 중간, 매개 등의 개념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이 책을 읽어보기로 한다.
피터 브룩스라는 학자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고, 전작이자 이론의 초석인 《플롯 찾아 읽기》를 읽지 않은 상태에서 바로 이 책을 읽은 것이 다소 무리였다는 생각도 든다. 또 비교문학 학자답게 폭넓게 인용하며 분석하는 서양 고전문학들도 버겁긴했다.
그러나 일반 독자들을 위해 전문용어 사용을 의도적으로 피했고, 논증하려는 바가 명확하고, 섬세한 분석을 담고 있지만 많지 않은 분량이어서 도전해볼만한 책이었다고 생각한다.



저도 서울외계인님을 통해 '서사의 위기'를 읽고 있는데 글이 어려워 진도가 잘 나가지 않네요.
인용하신 글도 마찬가지인데 많은 수련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ㅎㅎ
오, 재밌어 보이네요.